17枚の下書きで構図(こうず)を固め、ピカソは真四角に近い大カンバスに向かった。1世紀前、1907年初夏のパリ。カーテンに絡(から)んでポーズをとる5人の娼婦(しょうふ)は、後に「アビニョンの娘たち」(ニューヨーク近代美術館蔵)と呼ばれる。写実(しゃじつ)にこだわらない、絵画(かいが)革命の記念碑だ。画家(がか)はスペインを出て3年、25歳だった。
17장의 초안으로 구도를 잡고, 피카소는 정사각에 가까운 대형캔버스로 향했다. 1세기 전, 1907년 초여름의 파리. 커튼에 휘감겨 포즈를 취한 5명의 매춘부는, 후에「아비뇽의 아가씨들」(뉴욕 근대미술관장)이라고 불려진다. 사실에 구애되지 않는, 회화혁명의 기념비다. 화가는 스페인을 떠나 3년, 25세였다.
当時の、ベルエポック(麗(うるわし)しき時代)のパリは世界の若い才能を招き寄せ、いい仕事をさせた。イタリアのモディリアーニは21歳で来た。ロシアから移住(いじゅう)したシャガールは23歳。「一歩ごとに、あらゆるところで、街そのものが私の先生だった」と語っている。モディリアーニの隣部屋にやってきたのは26歳の藤田嗣治だ。
당시의, 벨에포크(아름다운 시대)의 파리는 세계의 젊은 재능을 불러 모아, 멋진 일을 하게했다.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는 21세에 왔다. 러시아에서 이주한 샤갈은 23세. 「한걸음마다, 모든 곳에, 거리 바로 그것이 나의 선생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모딜리아니의 옆방에 찾아든 것은 26세의 후지타 츠쿠지(츠쿠하루?)였다.
仏ポンピドー・センターが所蔵する、パリで活躍した外国人芸術家の作品が東京・六本木に集まった。「異邦人(いほうじん)(エトランジェ)たちのパリ」展(国立新美術館、5月7日まで)だ。
프랑스 퐁피두센터가 소장한, 파리에서 활약했던 외국예술가의 작품이 도쿄, 록폰기에 모였다.「이방인(에트랑제)들의 파리」전(국립신미술관, 5월7일까지) 이다.
自作が出品された抽象画家、堂本尚郎さんは「絵が売れ、いつものテラスではなく値段の高い奥の席につくと、カフェの給仕(きゅうじ)が自分のことのように喜んでくれた」と話す。異邦人が身を寄せる場所が、パリにはたくさんあった。
자신의 작품이 출품된 추상화가, 도우모토 히사오씨는 「그림이 팔려서, 여느 때의 테라스가 아닌 값이 비싼 안쪽 자리에 앉자, 카페의 직원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었다」고 한다. 이방인이 몸을 기댈 장소가, 파리에는 많이 있었다.
文化はしばしば、異質(いしつ)の出会いから生まれる。貧乏絵描き、路上(ろじょう)の物売り、旅芸人(たびげいにん)、移民に異教徒(いきょうと)。そうした部外者をつなぎとめ包容するのも、文化の苗床(なえどこ)としての都市の力量だろう。
문화는 종종, 이질적인 만남에서 생겨난다. 가난한 화가, 노점상인, 유랑극단, 이민에 이교도. 그러한 부외자(관계없는 사람)를 붙들어 매어 포용하는 것도, 문화의 묘상으로서의 도시의 역량일 것이다.
物陰(ものかげ)が追い払われ、すべて丸見えの息苦しい(いきぐる)街に、明日のピカソは住みつかない。回顧(かいこ)展(てん)が開かれる街もいいが、できれば、それを開かせる街でありたい。
그늘진 부분이 내쫓겨, 모든 것이 노출된 숨 막히는 거리에, 내일의 피카소는 자리 잡을 수 없다. 회화전이 열리는 거리도 좋지만, 되도록이면, 그것을 열리게 하는 거리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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