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声人語 2007年05月12日(土曜日)付
「橋のない川」を著した作家の住井すゑ(すみい すえ)さんは、「子育て」という言葉を嫌った。子どもの管理に通じる意識を、そこに見たからである。
「다리 없는 강」을 집필한 작가 스미이 스에씨는, 「아이 기르기」라는 말을 싫어한다. 아이 관리에 공통된 의식을, 거기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子どもこそいい迷惑。彼等(かれら)にとって、親という名の権力の下請人(したうけにん)によって管理される毎日なんて、たのしかろうはずがない」と20余年前の随筆(ずいひつ)に書いている。もう亡くなったけれど、政府の教育再生会議が準備してきた「子育て指南(しなん)」の緊急提言(ていげん)を知ったら、何を思っただろう。
「아이야 말로 달갑지 않은 친절. 그들에게 있어서, 부모라는 이름의 권력의 하청인에 의해 관리되는 매일이란, 즐거울 리가 없다」라고 20여 년 전의 수필에 쓰고 있다. 이미 사망하였으나, 정부 교육재생회의가 준비해온 「아이 키우기 지남(가리켜 지시함. 또는 이끌어 가르침.)」이라는 긴급제언을 알았다면, 무엇을 생각했을까.
「子守歌(こもりうた)を歌い、おっぱいを与える」「食事中はテレビをつけない」「早寝、早起き、朝ご飯を習慣づける」「うそをつかないなどの徳目を教える」……。驚くような中身ではないが、国の提言となれば話は違う。それはたちまち価値観(かちかん)を押しつけ、下請(したう)け人(にん)たることを親に求める言葉になってしまう。
「자장가를 부르며, 젖을 준다」 「식사중은 TV를 켜지 않는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아침밥 먹는 습관을 들인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등의 덕목을 가르친다」...... 놀랄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국가의 제언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순식간에 가치관을 강요, 하청인으로 만족할 것을 부모에게 요구하는 말이 되어버린다.
さすがに国民の反発を案じる声が政府内からも出た。「待った」がかかったのは良識ある成り行きだろう。「高みにいて人を見下(みくだ)したような訓示(くんじ)とかは、あまり適当じゃない」。伊吹文科相の見解(けんかい)に、我が意を得たりの人は多いのではないか。
과연 국민의 반발을 염려하는 소리가 정부 내에서도 나왔다. 「중지」되는 것은 양식 있는 결과일 것이다. 「높은 곳에서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 한 훈시 등은, 그다지 적당하지 않다」. 이부키문부과학상의 견해에 자신의 뜻과 일치한다는 사람은 많지 않을까.
自由主義教育を説(と)いたフランスの啓蒙(けいもう)思想家(しそうか)ルソーに、味わい深い一言がある。「世界でいちばん有能(ゆうのう)な先生によってよりも、分別(ふんべつ)のある平凡な父親によってこそ、子どもはりっぱに教育される」(「エミール」岩波文庫)。
자유주의교육을 설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루소에게, 체험 깊은 한마디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선생에 의해서보다도, 분별 있는 평범한 아버지에 의해서야말로, 아이들은 훌륭하게 교육된다」(「에밀」이와나미문고).
分別ある父母(ふぼ)を望むのは、教育現場をはじめ、多くに共通(きょうつう)した願いだ。そうした願いを、薄っぺらな説教の羅列(られつ)で果たせると考えているなら、再生会議は能天気(のうてんき)に過ぎるだろう。
분별 있는 부모를 바라는 것은, 교육현장을 비롯해, 대부분에 공통된 바람이다. 그러한 바람을, 얄팍한 설교의 나열로 이루려하고 있다면, 재생회의는 경박함이 도를 넘은 것이리라.